베네딕틴 청년모임

수도성소와 그 성장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물이다. 부르심을 받은 개인은 이를 인격적인 도전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회헌 6,1

최 이레네 수녀님 이야기

작성자
seoulosb
작성일
2023-11-22 11:27
조회
1781


먼 나라로 가면

내가 수녀원에 입회한 지가 어느덧 58년이 흘렀다.

정든 집을 떠나던 그 날,
어머니께서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자식도 많지 않은데 수녀원에 가는지 모르겠다"며
통곡을 하셨다고 전하던 사촌 언니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10 남매 중에서 6명이나 살아있는데도 자식이 많지 않다니...
요즘 사람들이 이 말을 듣는 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언젠가 막내둥이와 외동딸로 사는 친구를 부러워하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야 이 녀석아! 너 혼자 고아원에 가서 살아라!" 하시면서  몹시 꾸짖으시던
그 때 어머니의 말씀이 씨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고아원은 아니지만 똑같은 '원'자가 들어가는 수녀원에서 살게 되었다.
고아가 아닌 신선(?)처럼.

여하튼 내가 바라고 바라던 수녀의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웃지 못할 사연들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무모한 계획을 세워놓고 부모님의 동의도 없이 수녀원에 입회하려고,
친구의 집에서부터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나섰는데, 그만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를 때리시면서
"만일 천당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믿을 텐데, 이 세상에는 안 믿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이 좁은 땅 덩어리에서 네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나는 너를 찾아낼 수 있다.
비행기 타고 먼 나라로 가면 몰라도, 똑똑한 척 하지 마라!"고 하셨다.
부모님 몰래 집을 떠나려고 했던 나의 태도가 괘씸했던지 "잘못했다."고 아무리 빌어도 아버지의 화는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나의 집 떠나기 첫 번째 시도는 좌절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 4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수녀가 될 수 있을까?'하고 가능성을 계속 찾고 있던 중,
마침 하느님께서는 그 당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련장 수녀님이셨던 독일 수녀님과의 만남을 베풀어 주셨다.
그 때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첫 번째 실패담을 말씀드릴 수가 있었다. 정말 절호의 찬스였다.
"비행기 타고 먼 나라고 가면~" 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수녀님은 미소를 지으시더니,
"우리 수녀회는 국제 수도회라서 독일과 미국에도 수녀원이 있으니 그곳으로 직접 입회할 수도 있다." 는 희망을 주셨다.
그 순간 나도 수도생활의 꿈이 이루어지겠구나 하는 확신에 찬 기쁨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할 고민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며칠 밤을 궁리한 끝에 아버지께 "성당을 통해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기회가 생겼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초청장을 갖고 와야 믿을 수 있다." 고 하셨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미국 수녀원에서 보내온 초청장을 보시고 난 다음에야 내 말을 믿어주셨다.
이렇게 초청장까지 턱하니 보여드렸으니
"여권 수속이 까다로워서 수녀원에 적을 두고 수도복을 입고 여권 사진도 찍어야 한다."는 나의 말까지도 믿을 수 밖에.

이리하여 나는 다행스럽게 미국 Norfolk 수녀원에서 수련소의 정규 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대구 본원에서 약 3개월 정도 적응을 한 후에 그야말로 먼 나라로 날아가서 우여곡절 끝에 첫 서원을 하고 나서 4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련소 시절 두세 번은 보따리를 쌀까 말까 고민하며 싸놓았다가 풀긴 했어도,
그 시절은 마치 소나기 온 뒤의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가며 집을 떠난지 58년이 흐른 지금, 뒤돌아볼수록 감회가 새롭다.
문득 그 옛날 아버지의 한 말씀이 떠오른다. “늙어서 검은 수건 쓴 꼴을 어떻게 보겠느냐?” 고.
노인이 되어가는 수도자의 모습이 어쩌면 초라해 보이고, 청승맞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걱정하신 것일까?!
하지만 죽는 날까지 수도자로서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가는 것,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 같다.
같은 목적을 향해서, 같은 믿음 안에서, 삶을 나누며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해 주는 동료들이 함께 걸어가기에...
젊은 시절 택했던 이 길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갈 것이다.

나이 늙어 백발이 될 때라도 나를 버리지 않으실 하느님!
나는 오늘도 그분의 사랑과 축복에 감사하며 이처럼 젊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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