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울라 수녀님 이야기
작성자
Sr. M. Lucy
작성일
2025-02-22 15:56
조회
217

서른 살의 12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남들은 사춘기 때 고민한다던데,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지, 한창 열심히 바쁘게 살던 그때, 질문의 무게가 너무 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있는 줄은 알았지만, 눈길을 둬 본 적 없는 집 앞 성당으로 향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예비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예비신자 교리를 받은 지 2주 만에 내 가슴은 뜨거워졌다. 그때까지의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을 앞두고 밤낮없이 바쁘게 지내던 때였지만, 잠을 아껴가며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생애 영화를 줄곧 보았다. 궁금한 교리는 따로 찾아 공부하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며 교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뿐인가. 본당에서 하는 영어 성경 모임과 목요일마다 있었던 찬양 미사에도 매번 참례하면서 놀람과 행복의 연속인 예비신자 기간을 보냈다. 6개월 후 세례식 때 처음으로 성체를 모실 때, 나는 하느님께 다소 애매한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당신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입으로는, 나의 일이나 업적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 되기를 청하는 기도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삶이자 복된 삶인, 수도 삶을 나도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하는 기도임을 나와 하느님만이 아신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덜컥 중고등부 교리 교사회에 들어갔다. 담당 수녀님이신 우리 수녀원의 마리요한 수녀님을 만났고, 수녀님이 이끄시는 렉시오 디비나 모임에도 참여하면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커졌다. 하느님 덕분으로 드디어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을 마쳤을 때, ‘고생했으니 쉬고 오라’며 수녀님께서 수도원에서 하는 피정을 소개해 주셨다. 왜관 성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 체험피정’이었는데, 그때 처음 성소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피정에 다녀온 후, “저는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다음 달부터 또 나도 모르게 우리 수녀원의 성소 모임에 매달 참여하게 되었다. 수녀님들의 저녁기도는 천국을 연상케 했고, 수녀원의 맛있는 점심 식사에 마음이 홀렸으며, 수녀님들의 무조건적인 환대와 사랑은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만큼, 내가 바라는 아니 부모님께서 기다리시는 사회적 성공도 이루고 싶었고, 반대로 지고지순하신 하느님만을 따르는 수도 생활이 무엇보다 높은 가치임을 알기에 내 마음은 오랫동안 양분되었다. 오래 지속되는 만큼 내 영혼은 핍진해졌다. 하지만 결정을 지을 만큼 분명한 표징은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2년 동안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던 하느님께,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인사를 드리고, 수녀원에서 하는 피정에 마지막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피정 첫날 저녁, 성소 담당이신 하상 수녀님께서 내게 조용히 물으셨다. “하느님을 따르는 데에 어떤 장애가 있나요?” 이 평범한 한 문장의 질문에 나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인간 삶의 목적이신 하느님보다 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셨음을 깨달았다. 이어서 내 마음속에서는 마구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였고 멈출 줄을 몰랐다. 그것은 ‘환희’였다. 그날 밤에 쉽사리 잠들지 못할 정도의 큰 환희와 기쁨이었다.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나를 하느님께서 낚아채시던 그때. 그 사랑의 기억을 도무지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부모님께 조금만 효도하고 떠날게요’라고 하느님과 거래를 하며 다시 시간을 끌었다. 어디 더 좋은 직장은 없는지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집안에 사고가 일어났다. 모두가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정도의 사고였다. 쉬지 않고 묵주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녀님들께도 알려 기도를 받고, 이모와 예비 신자였던 남동생이 다니는 본당 교우분들, 우리 본당의 신부님과 수녀님, 교우분들께서 기도 부대가 되어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자비를 베푸시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이날 이후,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남동생은 무사히 세례를 받고, 조카들도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모든 상황에 훌륭히 맞서 이겨낸 올케도 세례를 받고, 아버지도 세례를 받으시어 우리 가족은 성가정이 되었다. 게다가 때마침 나를 유혹하는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동 기회가 연이어 찾아왔지만, “왜 면접보려고 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빨리 봉헌해야지.”라고 하시는 헤르만 수녀님의 말씀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면접장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동안 내가 손에 움켜쥐고 있었던 것들이 갑자기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나는 가족들에게 수녀원 입회에 대해 알렸고, 하느님의 자비와 돌보심을 체험한 우리 가족들은 어려워하면서도 기꺼이 허락해 주셨다. 이후에도 우리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느님 체험은 가히 놀랄만하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이기에 천천히 다정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느님을 절절히 체험하였다.
3년간의 방황이 있었던 때문인지, 수도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나’라는 사람에 맞추어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당신께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나 또한 최선을 다해 응답 드리고 싶은데, 물론 현실은 부족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를 받아들이시고 은총을 베푸시며 당신께로 인도하신다. 그 사랑에 나는 오늘도 염치없지만, 다시 그분 품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다. 하느님의 나의 구원 역사를 계속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그 깊은 의미를 알고 또 알아, 나도 사랑으로써 그분과 하나 되고 싶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여, 멈추지 말고 정진합시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 영광을!
전체 0